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는 박해받던 유대계 혈통의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스피노자는 유대 철학과 신학에 능통했기에, 주변에서는 그가 랍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자연과학과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을 받은 스피노자는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유대인들과 마찰을 일으켰고, 이후 유대교 사회는 그에게 혹독한 저주를 내리고 유대공동체에서 그를 파문해버린다.
이후 스피노자는 하숙집 다락방에서 은거했는데, 광학기구의 렌즈를 깎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철학에 몰두한다.
렌즈를 깎는 일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세련되고 정밀한 작업이 필요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렌즈 세공업자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조용한 삶을 살았던 스피노자는 4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는데, 그가 앓았던 폐결핵이 렌즈의 유리가루와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추측이 있다.
스피노자의 대표적인 저작은 다음과 같다.
「신과 인간과 그의 행복에 관한 짧은 논고(Tractatus brevis de Deo et homine eiusque felicitate, 1660)」, 「신학 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 「지성 개선론(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 1677)」, 그리고 통상 '에티카'로 불리우는 「기하학의 방식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1677)」.
스피노자는 「지성 개선론」에서 최고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에게 최고선은 최고 형태의 지식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앎과 인식에 있어서 4가지 방법을 이야기한다.
첫째, 우리는 어떤 사실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남에게 들음으로써 지식을 얻는다. 우리 자신의 생일에 대한 지식은 이런 유형이다.
둘째, 우리는 어떤 사실을 직접 경험해서 지식을 얻는다.
셋째, 우리는 논리적,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만약 우리가 참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방법을 통해 얻은 지식은 확실하다.
넷째, 우리는 직접적인 직관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 직관을 통해서 명석판명하고 확실한, 본질적인 지식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의 것과 유사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은 불확실하다.
세 번째 방법을 통해서 확실한 지식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네 번째 방법으로 포착한 통찰이 필요하다.
세 가지의 지식의 길이 불완전하다는 우리의 앎은 우리가 이미 네 번째 유형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이 스피노자를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합리주의 철학자로 분류할 수 있게 한다.
데카르트는 확고불변한 공리와 전제를 찾는 데에 중점을 둔 반면, 스피노자는 공리로부터 출발한 추론과 체계에 초점을 맞춘다는 차이가 있다.
이어서 「기하학의 방식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에 대해서 살펴보자.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기하학의 체계를 본따, 8개의 정의와 7개의 공리로부터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결론들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어떻게 인간이 삶의 불안과 정념으로부터 도피해 우주를 영원의 관점(수브 스페키에 아이테르니타티스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바라보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제1부와 제2부, "신에 대하여"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에서는 우주의 구조와 인간의 이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다룬다.
책의 제3부와 제4부, "정념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와 "인간의 예종 혹은 정념의 힘에 대하여"에서는 평온과 행복의 적으로서 정념에 대해서 다룬다.
우리는 외부적 힘에 휘둘리며 마음의 평형을 잃고, 불행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5부 "지성의 힘 혹은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에 이르러, 스피노자는 우주의 필연적 본질을 통찰하는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스피노자는 모든 정념이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좋은 감정(정념)은 우리의 활동성을 증대시키지만, 나쁜 감정은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든다.
활동적이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주도자가 된다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이 아닌 우리 내면의 정신적 힘이 우리의 행위와 삶을 주도할때, 우리는 활동적이다.
스피노자는 이 정신적 힘이 곧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본질이란 우리를 자연(신)과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지성적인 인식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신과 연관되어있다는 지성적인 인식을 통해서 고립된 작은 자아로부터 탈피해 우리의 정체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며 자유로워진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최고선이다.
동시에 이 사랑은 신이 유발한 사랑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신의 자기애이기도 하다.
신이 곧 자연이라는 그의 생각은 어떻게 도출된 것일까?
우선,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실체는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며,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그 자체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p.450)"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 개별 사물들을 실체라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실체는 보다 절대적인 정의를 갖는다.
실체는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 그 어떤 다른 개념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스피노자의 실체의 정의에 부합할까?
우선, 개벌 사물들은 결코 실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인공물이든, 자연물이든간에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이해될 수 있는 건 없다.
실체는, 하나이자 무한이다.
실체는 정의상 이 세계에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없기에 하나이다.
만약 실체가 둘, 혹은 셋이라면 그 실체들 간의 관계가 실체의 정의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이는 스피노자의 생각과 모순된다.
동시에 실체는 그 어떤 한계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한하다.
왜냐하면 한계는 다른 어떤 것과의 경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실체와 다른 것일 수 없다.
실체와 신이 달리 존재한다면 신과 실체에 대한 관계가 실체의 개념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와 신은 구분될 수 없다.
실체는 신이다.
따라서 하나이자 무한한 실체는 자연과 구분될 수 없다.
실체는 자연이다.
이때 신은 자연의 창조자가 아닌데, 실체는 창조된 것이 아니며 자연이 곧 실체이자 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실체를 토대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원론적 성격을 띤다.
신과 자연이 모두 실체라는 점에서 범신론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실체의 개념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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