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중세 12

아랍의 철학과 과학

이전 포스팅에서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업적을 보존했던 아랍의 지성적, 문화적 중심지에 대해 언급했다. 이들은 단지 헬레니즘의 유산을 보존하기만 한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계승하였다. 아랍이 이러한 작업을 시작한 시기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인 5세기경 부터였는데, 이는 중세 시대 최초의 대학이 등장한 때보다 상당히 이르다. 로마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의 국가들에서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작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와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Harun al-Rashid, 786~809 CE)를 주목해야 한다. 아바스 왕조는 8세기부터 시작하여 바그다드가 몽골 제국에 의해 함락되기..

대학의 출현

전 세계의 유명한 대학교들은 언제 처음 탄생했을까? 12세기 말엽이 되면, 고대의 교육체계에 근원을 둔 '대학'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대학의 개념이 대단히 불명확했으며, 오늘날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초기의 대학들은, 자유인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할 소위 필수교양과목(artes liberales) 7개를 가지고 있었다. 7개 과목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트리비움(trivium)으로서 문법학, 수사학과 논리학으로 구성된다. 이는 고대 정치가와 연설가에게 필수적인 과목들이다. 다른 하나는 콰드리비움(quadrivium)으로서 기하학, 산술학, 천문학과 음악으로 구성된다. 이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가 중요시했던 과목들이다. 이렇듯 중세 초기 대..

마르틴 루터(1483~1546 CE)

16세기에 이르러, 로마가톨릭교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몰락은 교회 내부에서의 타락, 권력의 남용, 재정적 문제, 그리고 종교개혁 등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서서히 진행되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우리에게 '95개조 반박문'으로 잘 알려진 신학자이다. 종교개혁가들은 단지 교회를 비판하고 번혁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신학적 독창성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맞물려 교회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개혁운동의 여파로 프로테스탄티즘이 탄생했는데, 마르틴 루터는 그 선구자격인 학자이다. 오직 신앙만이루터에 따르면, 우리가 신앙에 관련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성서에 기록되어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배우고 믿어야 할지 가르쳐줄 교부도, 공의회도, 교황도 필요하지 않다...

마르실리우스(1275/80~1342 CE)와 오컴의 윌리엄(1285~1349 CE)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고중세기(High Middle Ages, 13세기)에 정점을 이루었다. 토마스주의는 교황과 교회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학문적 근거였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권력 또한 매우 강력해졌다. 교황과 황제의 갈등에서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교황들은 공직 임명과 조약에 대한 감독권과 이단의 심판과 재산을 몰수할수 있는 권리 등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얻어냈다. 그들은 교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했으며, 그들의 권세를 지지하는 교리의 정비 또한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힘의 불균형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300년경 프랑스의 경우에, 우리는 불완전한 초기 국민국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3]

인간론과 도덕철학 아퀴나스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이번 파트에서도 유효하다. 사유제를 없애고자 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퀴나스는 인간의 세속적인 삶을 긍정하였다. 또한, 세속의 사람들은 굳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더라도 좋은 삶을 살 수 있으며, 윤리적 규범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아퀴나스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도덕규범 및 법규의 존재를 주장한다. 좋은 행위는 인간 고유의 본성과 능력을 잘 실현할 수 있는 행위인데, 이는 대개 이성과 관련된 활동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똑같지 않으며, 각기 다른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삶의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덧붙여, 아퀴나스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것으로 '절제'를 이야기한다. 위와 같이 ..

토마스 아퀴나스 [2]

존재론 책에서는 아퀴나스의 철학을 존재의 철학이라고 단정짓고 있을 정도로, 존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주요 개념들을 짚어보자. 존재와 존재자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는 주제일 것 같다. 존재자(ens)는 삼색볼펜, 옆집 누렁이, 저기 돌멩이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개별 사물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존재(Being, esse)는 무엇을 의미할까? 존재는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되는 "존재함(is-ness)"을 나타낸다.(p,274)". 존재란 저기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들어주는 무언가이다. 따라서 존재라는 것 자체는 사물이 아니며, 개별 사물 또한 아니지만, 삼색볼펜과 옆집 누렁이가 떡하니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만큼, 모든 존재자 내부에 특..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CE) [1]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1225년 이탈리아의 아퀴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 카시노 수도회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der)에 들어갔다. 수련 기간 동안 아퀴나스는 파리에서 공부하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혹은 Albert the Great)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아퀴나스는 신학교수로 임명되었고,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친다. 흥미롭게도 아퀴나스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1273년, 아퀴나스는 어떤 계시를 받아 큰 충격을 받고서는 그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에 대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뒤 어떠한 학술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중세 보편논쟁

보편자 논쟁, 혹은 보편논쟁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보편적인 무언가가 정말 존재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보편자 문제는 중세시대에 뜨거운 화두였으나, 논쟁은 오늘날까지 유효하다. 보편자(universalia)는 보편적 개념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정의, 선, 초록, 원, 인간, 거북 등을 지칭한다. 특수자(particularia)는 개별 대상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면 초록색 나뭇잎, 원형 축구공, 바다거북 등을 지칭한다. 보편자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실재론자(realist)라고 한다. 반대로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nomina)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명론자(nominalist)라고 한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실재론자들과 유명론자들의..

아우구스티누스 [2]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이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학을 어떻게 종합하였는지 살펴보자. 플로티노스가 이야기한 신플라톤주의적 '일자'는 기독교의 신이 되었다. 일자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지 않지만, 우주는 그 존재로부터 유출되어 위계적 질서를 가지고 창조되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우리가 사랑하고, 기댈 수 있는 인격신이다. 말하자면, 신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우주를 창조하였으며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우주는 신의 인격적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신의 의지는 역사적으로 세속적 사회에 뿌리내려있다. 우주의 창조부터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그가 언급한 계시는 역사적 제약에 놓여있는 것이다. 신앙심이 충만한 기독교인들은 계시와 성서를 통해서 신에게 부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통로를 ..

아우구스티누스(354~430 CE) [1]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기독교도인 어머니를 두었으나, 청년 시절 방탄한 생활을 즐겼다. 일례로, 그는 18세에 이미 아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속세의 쾌락과 향락에 빠져 있던 청년은 훗날 절실히 회개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 등에 관심이 있었다. 초기에 그는 당시에 유행하던 종교적 운동인 마니교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 교리에서 만족하지 못했고, 한때 회의주의로 기울기도 하였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보다 흡족한 대안을 얻어낸 것 같다.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제대로 알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