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중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CE) [1]

bianor 2023. 7. 23. 21:35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1225년 이탈리아의 아퀴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몬테 카시노 수도회에서 학업을 시작하여,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der)에 들어갔다. 
수련 기간 동안 아퀴나스는 파리에서 공부하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신학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혹은 Albert the Great)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아퀴나스는 신학교수로 임명되었고,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친다.
흥미롭게도 아퀴나스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1273년, 아퀴나스는 어떤 계시를 받아 큰 충격을 받고서는 그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것에 대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 뒤 어떠한 학술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작은 다음과 같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대이교도대전(S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 <진리에 관한 정규토론집(Quaestiones disputatae de ueritate)>


조화시키기

이번 포스팅에서는 아퀴나스의 사상을 개괄해보고자 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기독교 신학을 조화시켜, 종합적인 스콜라 철학을 개진하였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개별 실체로부터 형상을 파악하고자 했듯이, 아퀴나스 역시도 개념실재론을 수용하였다.
즉, 개별 대상들 안에 개념이 존재하며, 지식은 감각으로 시작되지만 우리는 추상화를 통해서 보편자를 인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우주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아퀴나스는 우주가 어떤 고차원적인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통찰 역시, 우리가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운 종교적 체험의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지만 어느 수준의 종교적 계시의 경우에는 이성을 통해서도 파악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이성과 신앙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통찰의 범주가 존재한다. 
아퀴나스에게는 신 존재의 증명이 여기에 해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성과 신앙은 합일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영향을 받아, 아퀴나스 역시 인간이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정치는 인간의 삶과 자아실현에 필수적이다.
아퀴나스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최종적 목표는 구원이며, 이때 성직자들이 도움을 줄 수 있다.
행복하고 윤리적인 삶, 즉 올바른 정치는 구원의 출발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퀴나스에 이르러 정치와 종교는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지도 종속적이지도 않은, 다소 애매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영원법은 신의 지식과 의지가 반영된, "피조물 전체에 대한 신의 섭리를 표현하는 이성의 칙령이다.(p.271)"
모든 사물은 신의 섭리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영원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은 좀 더 명징한 방식으로 영원법에 예속된다.
또한 인간은 이성(lumen naturale; 자연의 빛)을 통해 올바른 목적과 행위가 무엇인지 스스로 알 수 있다.
영원법이 인간들에게서 현실화된것이, 바로 자연법이다. 
자연법을 비롯한 법률은,"통치자가 법률의 지배를 받을 피통치자들의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공표한 이성의 칙령이다.(p.270)"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보편적인 법률과 우리의 행위를 오가며 사유할 수 있으며, 자발적으로 법을 따를 수 있다.
실제로, 법의 제약 하에 놓일 수 있는 존재들은 오직 이성적 존재들 뿐이라는 점은 아퀴나스의 주장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누군가가 법을 위반한다면, 타인에게 발생할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서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률의 준수를 통해서 우리는 4주덕인 지혜, 용기, 절제와 정의를 포함해 믿음과 소망, 사랑의 덕을 실현할 수 있으며, 우리의 최후의 목적지인 구원에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한편, 아퀴나스는 교회가 국가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생각했으며,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폭군을 파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또한 법률의 제정과 시행에 있어서, 교회가 국가의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앞선 포스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퀴나스 역시 영적 과업과 세속적 과업 간의 뚜렷한 구분선을 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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