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사/중세

중세

bianor 2023. 7. 6. 23:39

기독교와 철학

로마 제국은 기원후 4세기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된다. 
애초에 이 분할은 거대한 제국을 좀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4명의 황제의 통치 하에 놓을 것을 주장한 사두정치(Tetrarchy)를 시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들 간의 갈등이 잦아졌고, 체제는 불안정해졌으며 경제적 어려움도 닥쳤다. 
이후 서로마는 독립적인 제국으로 분리되어, 동로마와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전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듯,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은 사람들을 정치로부터 소외시켰으며, 이론철학은 약화되고 개인적인 윤리 문제나 행복의 확보 등이 철학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고대 후기를 접어들며 어떤 철학이나 사상체계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고, 사람들의 관심은 종교로 향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큰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선포하였다.(p.231)"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크고 작은 고통, 정치적 무력감, 물질적 빈부격차와 그 모든것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세에서의 우리의 삶은 내세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에겐 자비로운, 구원의 하나님이 계신다.

로마의 땅을 밟았던 초기 기독교도들은 그리스 철학의 전통에 몸담고있던 당시 지식인들과 대면하였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소위 유화 정책을 펼쳤는데, 그리스와 헬레니즘 철학의 도움을 받아서 성서를 옹호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신플라톤주의, 스토아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와 융합되었고, 이후 이 종합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배적 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철학사를 다룬 책을 읽어보면 이 시기를 철학의 암흑기라고 말하며, 철학이 기독교의 시종 노릇을 했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장은 다소 다른데, 철학이 기독교 성서의 해석을 위해서 취사선택 된 것은 맞지만 신학(기독교) 또한 철학에 적잖이 '오염'되었다는 것이다. 


어쩄든, 기독교와 철학의 융합은 새로운 생각들을 낳았다. 
이제 신은 인격신이자 창조주 신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은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존재한다. 
또한 현실세상은 우리 인격체 개개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모든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므로 평등하게 높은 가치를 지닌다. 
또한, 신의 우주 창조에서부터 시작해서 심판의 날까지 역사는 직선적이다.

 

 

교황과 왕

우리는 중세 시대를 봉건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봉건제란 왕(또는 황제)과 귀족 간의 관계가 상호계약의 형태를 취하며, 이에 따라 왕은 (자신의 봉신封臣인) 귀족에게 봉토를 부여하고 그 대가로 귀족은 왕에게 군사적 지원과 세금을 제공할 것을 서약하는 사회체제를 말한다.(p.235)" 
봉건제 하에서 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은 계속 변동했지만, 결국 왕권이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우리는 스토아철학의 자연법 사상을 살펴보며 그것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로마법을 정당화하는 데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았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논리로, 자연법은 현존법을 반박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들이 자연법에 있어서 보다 나은 통찰을 지닌 해석자라고 자처하는 집단이 나타나 현존법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교황과 황제가 그리스도로부터 각각 영적 권력의 칼, 세속 권력의 칼을 받고 있는 모습. 14세기 그림 추청. 이미지 출처: www.poprawka.de/kirche/ki.pdf 'Die Kirche im Mittelalter'


로마의 황제들은 현존법을 포함하여 자연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 신성을 유지하고 이로써 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유지하는 대신에 다른 권위에, 즉 교황과 교회에 이 해석을 위탁할 수 있었다.(p.237)" 
교회는 특히 윤리와 종교 문제에 있어서 관련 법의 해석 및 판정 권한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갈등을 촉발하는 불씨가 되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세속 권위의 복종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권력층과의 마찰 때문에 뻗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왕권의 판결이 그들의 윤리적, 종교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취하하거나 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했는데, 영적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일정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세속 권력이 필요하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민은 왕과 교회 양쪽에 이중의 충성심을 가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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